작업노트 3

2019. 8. 13. 21:12작업노트

 

《에코그린무빙가든3 : 잠시 쉬어가는 곳》 전시 첨부 글

18년도에 진행했던 작업 〈에코그린무빙가든〉을 연장시킨 전시를 할 계획입니다. 〈에코그린무빙가든〉은 전시 지원금 전체로 녹색 플라스틱 의자 100개를 사서 학교의 이곳저곳에 인공적인 녹색의 풍경을 잠시 구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전 작업은 학교의 공간적 특성을 기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작업을 진행한 후 남은 것은 플라스틱 의자 백여개와 사진자료였습니다. 자연히 잠시 설치되었다 철거되는 가변적 작업의 사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래 작업이 학교 내 공간을 겨냥한 프로젝트성 작업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작업을 진행한다는 일 자체를 다시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일회적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장기적으로 진행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갤러리 내에서의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일기장을 훔쳐봅니까? 우리는 블로그나 메모장이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나 그런것들을 몰래 봅니다.

도저히 생각이란 것을,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머리 몸통 다리로 구조화할 수가 없다. 짧은 서론과 긴 본론과 다시 짧은 마무리 말로 우겨 넣어지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병렬적으로, 여러 갈래로 한 번에 있다. 사실은 순서조차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꼬여있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읽고 써야 하니 나름의 번호를 매겨 쓴다 …*0

저는 모닥불을 가져본적이 없어요

 작업의 출발점은 항상 몇 가지의 예시로 잘 분류되지 않는다. 최소한 나에게는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 말장난, 낙서, 계획적인 드로잉, 갑자기 새롭게 보이는 사물들 그리고 풍경 혹은 장황한 이야기나 누군가의 과거사, 허구와 실화 모두. 이것들을 한 번에 묶어 '일상에서의 발견'과 같은 것으로 부를 수는 없다. … 결국 상상으로, 메모로, 드로잉으로 존재하던 것들을 관객에게 공개하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나, 작업자 본인이 작업 속에 어떻게, 얼마만큼 트러나는지의 여부이다. 작업이 타인에게 공개되거나, 자료로서 기록될 때까지, 어떤 선택을 해야 나의 존재가 희미해질 수 있는디, 혹은 마치 희미한 것처럼 보이게 될지를 고민한다.

특히 벽난로는 정말 가져본적이 없어요.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스와이프와 클릭으로 행위하며 전시된다. 구경꾼이자 구경거리가 된다. 손가락이나 마우스로 위아래로 스크롤을 굴리고 화살표와 손짓-제스처를 통해 앞으로 뒤로 돌아다닌다. 세상은 어쨌든 여기에 항상 잘 있다. 그것에 안심한다. 몸뚱이는 안전한 모험을 떠나 이것저것 본다. … 나의 감수성, 추억, 마음은 … 'www'와 '@'로 표시되는 곳에 있다. …(실제로는->) 아무리 없는 사람인 척 문 뒤에 순어 가만히 있어도. 아무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발각되는 즉시 흔적을 남기고야 만다.

방학이나 학년 따위의 정해진 칸막이로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간다.

울거나 웃거나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가혹한 일이다. 아주 순수한 눈물의/웃음의 결정체를 마주쳐야만 그토록 순수한 울기 혹은 웃기가 가능할 것이다. 슬픔/행복과는 다른 울기/웃기의 분류법이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야 하며, 원초적이면서도 즉각적이어야 한다. 마주치는 순간 눈물이 4줄기로 펑펑 흘러내리거나 갈비뼈가 아플 만큼 몸통을 가누지 못하며 웃어야 할 것이다. 같은 것에 울거나 웃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친구 혹은 최고의 라이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파티션을 넘어갔을때 비로소 전시장 풍경을 한번에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파티션 위치는 테스트 후 확정)

부동한 것, 큰 것, 영속적인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다. 땅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느낀 모든 가벼운 것들을 가장 무겁고 거대한 것으로 바꿔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은 가변적으로 존재한다. 다달이 돈을 내고 먹고 살며 등록금을 내고 작업실을 사용할 권한을 얻는다. 그리고 항상 옮겨 다닐 준비를 한다. 나는 (우리는?) 이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 속에서 그래도 기념비를 세워보자면, 그것은 다시금, 접혀있거나 말려있는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나는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이것들을 표정, 얼굴, 감정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라는 형식을 모국어처럼 즉각적으로 느낀다. 해석하기 전에 감정으로 느낀다. 기호가 나타내는 감정에 닿기까지 해석하거나 분석해야 할 형식이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내 것이다. 내 시대의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공감할 사람들은 애초에 정해져 있을 것이다.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여줄 사람은 많겠으나 결국 나와 같이 울거나 웃으며 감탄할 사람들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

그런데 혹시 제가 휴가를 좀 가지면 어떨까요?

우리 다같이 앉아 그냥 쉬면 안될까요?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곳에 가만히 앉아있는건 어때요?

그것이 존재했던 것을 상상으로 떠올릴 수만 있는 것. 내가 기억하는 것이 확실한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채로 추억의 카테고리에 넣어둘 수만 있는 것이 도대체 노스탤지어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제 나의 노스탤지어는 인터넷에 상당부분 존재한다. 지금은 소멸된 서버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가끔, 유행이 지난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이트로부터 알림메일이 오곤 한다. 지금까지 보관되었던 자료가 곧 삭제될 것이니 자료를 백업해 두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소중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때가 나를 향수에 잠기게 한다. 나는 항상 그것들을 곁에 두고 자꾸 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만들어낸다. 실체가 없는것들에 몸을 만들어준다. 너무 가볍고 뜻 없어보이는 현대의 이미지들을 (사실 나에게는 이미 잊혀진 과거를 상징하는) 비판해야하나? 이것이 현대의 치명적 단점일까? 그렇지만 나는 ……~~!!!

'절망'이라는 것은 나에게 뜨겁거나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항상 모든 것에 조금씩 묻어있는 정도이다.

(캬~!)

 우리는 감정을 접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형식으로 세대의 종류를 나눠본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울고 웃는 사람들,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에 울고 웃을 사람들, 그것 말고 올리비아 핫세가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에만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 혹은 그것을 모티브로 한 인터넷 소설이나 웹툰, 망가, 동인지, 어떤 썰 들에만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와닿지 않는 것은 형식적이고 거창한 것으로 치부하게 되는 현상은 분명 언제나 있다. 
 나는 이미 희곡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할지라도 마들렌으로부터의 전환이 대단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 더 이상 산문적인 글로써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없다. 나는 기차가 나오는 영화를 봐도 놀랄 수 없다. 이제는 심지어 영화관에서 물을 뿌리고 의자를 흔들고 등을 대려도 놀라울 것이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지금을 탈피할 수 없다. 요즘 세상엔 아이들은 없고 디지털 키즈만 있는것이 아닌가?

저에게 남은것은 작품일까요 짐일까요?

 게다가 모든것이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우리는 눈물 한방울 짜내기 위해 긴 서사시를 다 들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의 2시간도 사실 불필요하다. 엉엉 울게 하는 눈물의 소스는 3분 내에 끝난다. 내가 울어버린 것들은 그것을 보는데 1초 정도만이 소요될 뿐이다. 눈 한번 깜빡하면, 찰나에 우리는 울거나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것들은 사실은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한번 불면 넘칠만큼 준비된 감정을 잠깐 흔들어주는 것들…. 

소지품과 함께 조각 몇개를 남겨두었는데, 어떻게 토막내고 분리해서 버려야할지 고민중이에요.

몸과 마음으로 노동하는 중에도 나는 표정을 짓는다. 표정은 망상에서 나온다. 내일 이후의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의 누구를 죽인다거나 내가 죽는다거나 하는 없어짐과 끝남의 욕구를 가늠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망상의 대부분이 과거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사는 것, 다른 선택을 하는것에 관한 상상이다.

전시란?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생각하거나 노동하거나 취득하거나 잃거나 꽤 다양한 것을 하는 와중에도 엉엉 울지 않고 있다. 조마조마하지만 '일상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 이제껏 나의 생활을 가능케한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1 정당한 비극을 획득하기, *2 태도 고르기, *3 좋은 것으로 가기

저는 아카데믹한, 제도같은 그런거 되게 좋아해요

질투나 박탈감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내 집에서 가져온 준비물과 같은 것이 다. 비극은 아주 좋은 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에 가끔 큰 도움을 준다. 질투 뒤에 나에게 겹쳐 보이는 실패나 고통에 있어 좋은 원인이자 변명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고로 비참하고 슬픈 비극이 필요하다. 내가 준비한 비극, 절망, 불행들은 아주 정당해야만 제대로 작동할 것이기 때문 이다. 근래라는 시간에는 비극이 없다. 어제의 불행은 당장 비극이 되지 못한다. 죽음과 같은 것들도 당장은 주변으로부터 충분한 위로를 듣겠지만, 그것이 나의 비극으로서 작동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 다. …… (특히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평가하는 것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을 감지해내는 데에는, 이것이 나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통상적인 것들에 견주어 나의 불행이 꽤 나쁜 편에 속한다면, 그때는 이것을 가다듬어 비극으로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1

이것도 사진을 찍어 제 포트폴리오가 된답니다.

불행과 비극을 고백하는 일에 있어서 잠시라도 눈물을 말리려고 눈동자를 굴리거나 혹은 아예 꺼이꺼이 울어버린다면, 상상 속에서도 고칠 수 없는 후회만이 남을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변명의 패가 남지 않아서 낡은 것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난감한 것도 없다. 창피한 기억이라도 남아있어야 나의 성장이라도 들먹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 아 처음부터 만들어내자면, 언젠가는 앞뒤가 맞지 않아 민망한 죄책감까지 얽혀버릴 것이다. 
그래서 태도는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충격과 공포의 불운 에 대비해 절망과 비극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시나리오를 짠다기보다는 미리 준비하여 때가 왔을 때 덤덤하고 희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위함이다. 반대되는 것들이 붙어있는 일은 항상 대충 은 멋있고, 비극에는 희극적 태도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재료로 친구와 친구 아닌 사람들보 다 0.1 만큼이라도 멋져 보이는 것이 나를 구하는 일이다. *2-1

그거 있지요, 아무도 없는 숲에 굉음이 났는데 들은 사람이 없으면 그것이 소음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

… 내가 접한 모든 것들로부터 비극 을 대하는 방식을 배운다. 그것들 중 몇 개는 제외하고 몇 개는 짜깁기해서 다음 불행을 준비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불행이 언젠가는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행과 비극을 자석처럼 따라 다니는 사람이라도 새로운 것 없이 고인 물이 되어서 지루해질 수는 없다) 새로운 태도를 만드는 일은 고된 것이지만 하다 보면 점점 잘 할수 있게 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몇 번씩 준비된 반응을 잘 수행해 낸다면, 어느샌가 진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 을 송강호나 이자벨 위페르 만큼이나 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원래 저런 입장을 타고 난 것인지, 실수 뒤에 만들어낸 것인지가 헷갈리는 사람들. *2-2

항상 생각해요. 빠진 이빨들이 보고싶다고. 이는 몸 성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뼈 잖아요.

내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 나쁘고 힘든 것들을 제하고 나면 무언가 조금은 남을 것이다. 그것 이 나에게 좋은 것들이다. 그러한 쪽으로 가려면, 항상 뻥 뚫린채로, 너덜하게 열려있는 채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원하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뜨거운 것은 나쁘다. 열정과 애정을 들키는 일은 약점 을 잡히는 것이고 그것은 나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차가운 것으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단단해지면 안 된다. 하지만 단단해지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무뎌지는 일은 쉽다. 맞닥트린 모든 것을 잠깐 외면하거 나 거기로부터 한눈파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뎌질 수 있고, 그렇게 뭉툭해지면 점점 단단해진다. 단 단하고 무거워진 채로 계속 오래 있을 수 있다. 외면하고 피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고 그래 야 할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을 계속 예민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갈라내야 한다. 오래있음으로 인해 유지할 수 있다. 유지하는 것은 생존이다. 생존은 아마도 당장 70억 명쯤은 거뜬 히 해내는 것이다. 생을 유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기에 나는 이미 가진 것, 가져본 것이 너 무 많다. 나는 너무 많아서 발에 채이는 것들 중의 하나가 맞지만, 나를 닮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 을 항상 의식할 수 있다. 이것은 능력보다는 작은 요령 같은 것이다. 내가 먼지와 같다는 것을 계속 의 식하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서 다시 0.01 정도라도 더 거만한 쪽이 되어야 한다. 좋은 생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갉아먹을 것이고 갑자기 찾아오는 절망에 소멸 하기에, 무너지기에 딱 좋은 위치에 서 있는 것 뿐이다. 나는 뿌리가 없어야 살아갈 수 있다. 먼지나 가 벼운 쓰레기처럼 계속 허공에 떠돌아야 한다. 어떤 때에는 흩어진 채로, 그러나 가끔 모여서 언뜻 보 면 나인 것처럼 그렇게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튼튼한 말뚝이 되지 않고 계속 무언가의 다음 것으로 나를 넘어가게 할 방법이다. *3

기쁨에 도달하는 것은 정말 너무 너무 어렵다.

 … 공포는 정확히 짚어져 버리는 것이다 … 내가 애써 숨긴 모양새가 낱낱이 조명에 쏘여지는 일이 두렵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없어지지 않을까? 아주 정확하고 사려깊고 예민하게 나를 설명해내는 데에 성공할 때마다 비극과 불행에서 덤덤하게 분리된다. 그것은 패를 잃는 일이다.

동쪽엔 큰 건물들이 있어서 해가 보일리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불행을 쥐고 사는 것이다. 불행-비극에 대한 준비는 되었지만, 그것이 없는 것에 대한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설명을 하는 것은 항상 괴로운 일이다. 전혀 다른 설명문을 만들어낸다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다.

--가 알려준 동쪽 방향을 내가 믿지 않았다. 다른 방향에서 빛이 오는것 같았다.

나의 노력을 누군가 알아버렸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대화 상대이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2-3

참고로 《에코그린무빙가든3 : 잠시 쉬어가는 곳》 의 두 영상은 넷플릭스를 틀어둔 것입니다.

 

벽난로 4K : 가상의 따뜻한 자작나무 벽난로

 

벽난로 4K : 탁탁 타오르는 가상의 가정집 벽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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